배터리 산업에 관심 많은 EU는 빠르게 정책을 수립했다. 지난 2017년 EU는 배터리 생산과 유통, 재활용에 이르는 밸류체인을 역내에서 구축하기 위해 '유럽 배터리 동맹'(European Battery Alliance)을 결성했다. 또 지난 2020년부터는 ‘지속가능한 배터리법 입법 추진을 시작했다. 올해 2월에는 이 법안에 적용 대상을 확대하고 폐배터리 회수율 목표를 강화해 수정안을 채택, 4월 통과시켰다.
Chapter 4. 앞서가는 미·중·EU, 뒷짐 진 한국
그렇다면 주요국 정부의 정책은 어떻게 바뀌고 있을까.
전기차 시장에 빠르게 진입한 중국은 강력한 정부의 힘을 앞세우고 있다.
유럽과 미국 역시 자국 중심의 제도 마련에 힘쓰고 있다. 문제는 우리나라다.
국내 규제는 아직 큰 틀만 제시됐을 뿐 진척이 없다. EU·미국의 배터리내 재활용 원료 함유량 규제로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하는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우리가 주도적으로 세울 수 있는 정책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정책을 마련하기 위해선 업계와의 긴밀한 소통이 요구된다.
유럽·미국·중국 등 주요국들은 배터리 재활용에 대한 규제를 앞서서 시작했다.
중국은 지난 2012년 배터리 생산업체에 폐배터리 재활용을 유도한 '에너지 절약 및 신에너지 자동차 산업 발전 계획'을 시작으로 관련 법률을 꾸준히 만들어왔다. 2015년에는 전기차 배터리 등록번호제도를 도입했고, 2016년에는 ‘생산자 책임 확장제도’ 추진 방안을 통해 정부 감독 체계를 구축했다. 배터리의 생산부터 유통, 회수, 재활용까지 전 과정을 모니터링 할 수 있는 관리감독 체계를 형성한 것이다.
미국은 EU·중국에 비해 다소 늦게 정책을 꾸렸지만, 정부 차원의 강력한 투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미국 에너지부(DOE)는 지난 5월 초당적 기반시설법(Bipartisan Infrastructure Law)을 통해 배터리 제조와 재활용 시설 투자에 31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밖에 배터리 원료를 공급망으로 되돌리기 위한 재활용 공정을 개발하는데 6000만달러를 별도로 투자키로 했다.
한국, 뒤늦은 정책 마련
지난 9월5일 정부는 산업통상자원부·국토교통부·환경부 등 관계부처 합동으로 전기차 사용 후 배터리 산업에 대한 규제·제도개선 및 지원에 나선다고 밝혔다. 규제개선·지원을 통한 순환경제 활성화 방안이다.
재활용업은 산업분류표상 서비스업으로 분류돼 그간 배터리 재활용 업체들은 공장 운영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번 활성화 방안에는 사용 후 배터리를 신청 없이도 순환자원으로 우선 지정하는 '순환 자원 선(先)인정 제도'가 포함돼 있다. 사용 후 배터리가 순환자원으로 인정될 경우 폐기물에서 제외돼 폐기물관리법상 규제가 면제된다.
정철원 성일하이텍 전무는 "사업 초기에는 폐기물 처리가 서비스업으로 분류됐다"며 "서비스업은 공장으로 인정이 안 되기 때문에 공장등록증을 받지 못해 애를 먹었다"고 털어놨다.
국내 전기차 사용 후
배터리 산업 활성화 방안
추진과제 | 주요부처 | 내용 |
---|---|---|
규제 개선 및 제도 정비 | 환경부 | 전기차 사용 후 배터리에 대한 폐기물 규제 면제 |
산업통상자원부 | 안정성 검사제도 마련 및 검사부담 완화 | |
국토교통부 | 전기차 배터리의 별도 등록 및 관리체계 마련 | |
산업통상자원부, 국토교통부, 환경부 | 전주기 이력관리체계 구축 및 정보공유방안 마련 | |
통합관리체계 구축 | ||
산업 활성화를 위한 지원확대ᆞ기반 확충 | 산업통상자원부, 국토교통부, 환경부 | 사용 후 배터리 관련 기술 R&D 지원 |
환경부, 산업통상자원부 | 신제품 기술 실증ᆞ상용화 지원 | |
산업통상자원부, 국토교통부, 환경부 | 사용 후 배터리 친환경성 평가ᆞ인증 강화 |
첫발 뗐지만…
하지만 이번 정부 활성화 방안은 배터리 재활용에 대한 국제적 규제 개선 흐름에 뒤늦게 발맞춘 수준에 불과하다는 평가다. 많은 규제가 구체화된 글로벌 주요국과 달리 큰 틀만 제시해 시장의 혼란만 가중하고 있어서다.
대표적인 예가 등 배터리 관련 정보 공개 여부다. 우리 정부가 제시한 규제개선·지원을 통한 순환경제 활성화 방안에 따르면, 오는 2024년까지 사용 후 배터리 재사용·재활용 시 해당 배터리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제공될 수 있도록 전기차 배터리 전(全)주기 이력관리 체계가 구축된다. 아울러 사용 후 배터리 진단·검사, 재사용제품 제조 등에 활용할 수 있도록 배터리 내부제어시스템 정보 공유방안이 마련된다.
이는 글로벌 국가와 유사한 흐름이다. 중국의 경우 이미 BMS를 포함한 배터리 관련 정보를 모두 공개하는 시스템이 구축됐다. 유럽도 재활용 업체의 BMS 접근권을 허용한 규정을 내년부터 적용할 예정이다. EC 관계자는 "BMS에 대해 정당한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 접근을 제한한다는 것은 공익의 문제"라며 "합법적·사업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제3자가 BMS 내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다만 국내 규정에 이를 적용하는 과정은 녹록지 않을 전망이다. 국내 완성차·배터리 업체가 BMS 공개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아서다. 유럽연합 역시 BMS 공개로 정책방향을 잡으면서 완성차·배터리 업체 반발을 피할 수 없었다. EC 관계자는 "BMS 데이터 접근과 관련해 완성차·배터리 제조사들의 반발을 기각했다"며 "논의를 통해 BMS 공개 조치가 공익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이해시켰다"고 말했다.
생태계 각자 역할해야
이해관계자 역할·부담 잘 나눠야
민간 차원에서는 이해관계자간 역할과 부담, 책임의 범위를 정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전기차를 만드는 완성차, 배터리 제조사, 재활용 업체, 정부 등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실제 우리 정부는 민간 중심으로 사용 후 배터리 통합관리체계를 구축한다는 구상을 세웠다. 배터리·자동차 제조사, 배터리 재사용·재활용 전문업체가 주도하는 '배터리 얼라이언스'를 통해 업계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정책을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다만 올 하반기 내 출범 계획인 배터리 얼라이언스는 아직 첫 논의조차 못했다. 배터리 재활용산업 성장 가능성이 확실한 만큼, 선제적이고 과감한 제도 확립이 필요한 대목이다. 이에 대해 산업부 관계자는 "현재 배터리 얼라이언스 구축을 준비하는 단계"라며 "민간 시장을 어떻게 창출할 것이고, 어떤 부분까지 공유가 가능한지 완성차 등 업계 논의를 통해 정한 내용을 기반으로 합의안을 도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우리 정부는 이런 과정을 통해 많은 경우의 수를 다 보고 난 뒤 각자의 책임 범위를 판단한다는 입장이다. 배터리 재활용 시장이 초기 단계이므로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는 것인데, 자칫하면 제도가 현실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수도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배터리를 재제조하는 경우, 전기차에서 나오는 사용후 배터리를 에너지저장장치(ESS)·전기 자전거에 다시 쓰는 경우, 화학적으로 원재료를 회수해 재활용하는 경우 등 재활용 형태에 따라 관리와 책임 문제가 달라질 것"이라며 "어떤 업체가 폐배터리를 수거하고 어떤 제조 업체가 책임을 지는지는 각 비즈니스모델(BM)이 정착되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업계에 따르면 중국은 이미 블랙매스 반출을 금지해 자국 내 순환경제 구축을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유럽은 역내 재활용을 원칙으로 하되, 역외에서 재활용할 경우 일정 기준을 따르도록 관리·감독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반출 금지나 마찬가지다. EC 관계자는 취재팀에 “블랙매스의 역외 반출 규제는 내년부터 적용할 예정이나, '금지'의 성격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라며 "역외에서 배터리를 재활용한다고 해도 역내와 마찬가지 조건에서 이뤄지도록 법적 원칙을 수립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경우 대놓고 규제하기보다는 인센티브와 같은 '당근'을 통해 반출을 제한할 것으로 관측된다. IRA에 그런 대목이 발견된다. IRA는 배터리 제조에 사용된 핵심 광물이 미국 및 미국과 FTA를 체결한 국가에서 추출 및 처리된 경우, 북미에서 재활용된 경우 보조금을 준다. 이를 따르지 않아 보조금을 못 받으면 사실상 가격 경쟁력을 갖출 수 없기 때문에 인센티브는 규제와 다름 없다는 분석이다.
블랙매스 반출 금지가 배터리 재활용 사업에 의미하는 바는 적지 않다. 블랙매스 반출을 제한하면 재활용 업체는 블랙매스를 황산으로 녹이고 각 원재료를 뽑아내는 후처리 공정도 함께 갖춰야 해서다.
국내 배터리 재활용 업체인 성일하이텍은 인도, 헝가리, 말레이시아 등에서 생산한 블랙매스를 전북 군산 하이드로센터로 가져와 후처리 공정을 진행한다. 블랙매스 반출이 금지되면 성일하이텍은 한국뿐 아니라 블랙매스까지만 생산하는 국가에서도 후처리 공정을 운영해야 한다. 화학물질을 다량 사용하는 후처리 공장을 지으려면 더 엄격한 환경 규제에 직면하는 어려움도 겪을 전망이다.
이에 따라 국내 기업 차원에선 주요국 정책 변화에 대응한 공장 시설 보완 및 증설과 기술 개발·제휴, 다양한 사업자와의 협력 등이 요구된다.
손정수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 연구원은 “유럽에서 블랙매스 반출 제한을 하면 현지에 공장을 추가로 지어야 하는데, 중국과 한국이 배터리 재활용 기술 측면에서 경쟁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우위에 서려면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며 “배터리 재활용 시장은 전망이 밝으나 아직은 경제성 있는 공정·우위 사업자도 정해지지 않은 까닭에 배터리 산업 전후방 기업뿐 아니라 전혀 관련 없는 기업까지도 뛰어들고 있으므로 기술제휴·M&A(인수·합병) 등 다양한 시도가 요구된다”고 말했다.
민간 노력 더불어 '정부 감독' 병행돼야
정부 차원의 관리·감독 체계 구축 등 최소한의 규제는 필요하다. 전기차 보급 규모가 1000만대를 넘어선 중국에선 관리 문제가 벌써 나타나고 있다. 코트라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에선 2018년 기준 폐배터리 7만4000톤 가운데 5000톤만 정부 인증 재활용 업체에서 회수 처리된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 정부는 배터리 재활용과 관련한 표준과 처벌 규정을 내놓고 있으나, 실제 대다수 폐배터리는 검증되지 않은 업체를 통해 처리된다는 뜻이다.
유럽연합(EU)도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EC 관계자는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배터리 원재료가 회수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순환경제를 만드는 것이 새롭게 도입할 규제 목표"라며 "유럽에선 배터리 제조뿐 아니라 재사용, 재활용이 엄격한 기준과 윤리적 방식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가 내놓은 '규제개선·지원을 통한 순환경제 활성화 방안'에도 비슷한 고민이 담겨있다. 전기차 배터리의 전주기 탄소배출량 산정에 필요한 기초정보 데이터베이스(DB)를 확충하고, 평가기법을 개발해 신제품 대비 탄소 배출량이 적은 배터리 재제조·재활용을 촉진한다는 계획이 있다. 쉽게 말해 배터리 재활용에도 탄소배출량을 산출해 관리하겠다는 원칙이다. 또 재활용 과정에서의 환경오염 문제는 기존 환경규제로 관리하겠다는 판단이다.
정부 관계자는 "이번 활성화 방안은 재활용으로 인해 발생하는 환경오염 요인까지 풀겠다는 게 아니라 재활용 사업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기존 규제들을 개선하겠다는 것"이라며 "배터리 재활용 과정에서 나올 수 있는 환경오염은 기존 환경규제를 통해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차세대 배터리 재활용 기술 개발
배터리 재활용 공정을 보면, 기술적 한계로 모든 원재료를 추출할 수 없다. 김홍인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순환자원연구센터장은 "배터리 셀에서 재활용하는 비중이 100%는 아니다"며 "재활용 비중이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60%라면 나머지 40%도 재활용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시장에선 니켈, 코발트와 같이 돈 되는 금속을 주로 재활용하는데 케이스, 기판, 냉각팬, 전기 연결선 같은 것들도 재사용 또는 재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흑연 분리 기술 개발이 그 일환이다. 현재까지 재활용 기술은 양극활물질을 분리하는 것에만 집중돼 있다. 배터리 음극재로 활용되는 주 원재료인 흑연에 대한 연구는 아직 부족한 상태다.
블랙매스에 포함된 양극활물질과 흑연을 함께 침출 용액에 투입하면 거품이 발생해 넘치는 ‘버블링 현상’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 또 현재의 기술력으로는 블랙매스를 재료를 녹이는 산성 용액에 담그면 흑연은 산을 머금은 상태로 분리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분리된 흑연은 지정폐기물로 분류된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물을 활용해 광석에서 원자재를 분리하는 ‘부유 선별 방식’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물 속에서 양극활물질은 가라앉고, 흑연은 떠오르는 특징을 적용한 기술이다.
김 센터장은 “아직까지 전 세계에서 흑연을 분리하는 기술을 가진 재활용 업체는 없다”며 “배터리 재활용을 통해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도록 흑연을 침출 공정 전에 분리해 지정폐기물로 버려지지 않도록 분리 기술을 고도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기획취재
- 비즈니스워치 김동훈 백유진 기자
- 영상 촬영·편집
- 비즈니스워치 곽정혁 PD
- 전문가 자문
- 마크 미스트리(Mark Mistry) 니켈 인스티튜트 시니어 매니저
팀 존스턴(Tim Johnston) 라이사이클 회장
아제이 코차르(Ajay Kochhar) 라이사이클 CEO
정철원 성일하이텍 전무
김두홍 SK온 유럽경영관리 유닛 PL
루페르트 마르톤(Ruppert Márton) SK온 헝가리법인 HR 담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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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준호 포스코홀딩스 이차전지 소재사업담당 리더
손정수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 연구원
김홍인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순환자원연구센터장
김기현 한국환경공단 차장 - 후원